최근 극장에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영화화한 '위키드'를 보고 왔습니다. 이전에 뮤지컬을 들어본 적도 없고, 원작 소설조차 접해보지 못했습니다만, 1939년 영화 '오즈의 마법사'를 즐겁게 본 경험이 있어, 이 영화에서 오즈의 마법사 디자인을 채용한 부분들을 인상 깊게 챙겨 볼 수 있었습니다. 인물과 배경의 디테일을 찾아보는 요소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최근 극장에서 본 상업 영화 중 연출이 정갈하게 되어 있어, 시각적 만족감도 훌륭했습니다. 2시간 40분 동안 빠른 템포이지만, 적절하게 펼쳐진 기본기 탄탄한 연출로 편안하게 볼 수 있었죠.
다행스럽게도 위키드 관련 소스로 유튜브에 "What is this feeling" 영상이 올라와 있어, 해당 영상에서 사용된 다양한 연출들을 '인물의 대립'을 중심으로 분석해보고자 합니다. 영상을 먼저 보고, 글을 읽는 게 좋습니다!
기본적으로 영화에서 대립하는 인물은 화면 좌우에 배치하여 대립(혹은 진영)을 극대화시킵니다. 그리고 서로 두 인물은 마주 보거나, 등을 돌리는 행동을 취하게 됩니다. 느린 템포 편집을 사용한 예술 영화에서는 대립의 항상성을 유지하며 연출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운 편입니다. 반대로 상업 영화는 초단위로 로케이션이 바뀌고, 컷이 넘어가기 때문에 항상성을 유지하며 연출하는 것에 제약이 많은 편입니다. 때문에 평범한 상업 영화에서 좌우 대립 유지는커녕, 아이픽스(Eye fix; 관객의 시선이 집중된 지점을 중심으로 다음 샷의 피사체 위치 연결) 지점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습니다. 이를 유념하며 아래의 이미지들을 보신다면, 영화 위키드가 빠른 템포에도 이를 유지하고자 어떤 노력을 펼쳤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노래 도입부, 두 인물의 대립 관계가 양분된 화면으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좌 - 글린다, 우 - 엘파바). 한동안, 혹은 이후 영화 전체에 두 인물의 관계가 화면에서 어떻게 그려질지 예상되는 대목이죠. 그리고 해당 장면에서 감독의 감각이 드러난 부분은 노래 리듬에 맞춰 컷을 배치하였고, 두 인물의 동일 구도 샷을 번갈아가며 사용해 화면의 지루함을 타파하고 있습니다.
잠들지 못하고 일어난 글린다와 엘파바가 다시 대립하는 모습. 역시나 "좌 - 글린다, 우 - 엘파바"를 유지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두 인물의 시선은 자신의 위치와 반대되는 곳을 유지한다는 점입니다.
한바탕 소동에도 "좌 - 글린다, 우 - 엘파바"를 유지하는 모습
"좌 - 글린다, 우 - 엘파바"를 유지하는 모습
이 장면(직전 교내 행진 장면부터)은 두 인물의 배치를 자연스럽게 바꾸기 위한 중립씬이라 볼 수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두 인물의 좌우 배치를 바꾸게 되면,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샷 연결에 부자연스러움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위처럼 중립씬(혹은 중립샷)을 넣어 뒤에 이어지는 장면에서 두 인물 배치가 달라져도 부자연스럽지 않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죠. 영상에서도 이 샷 이후로 기존 "좌 - 글린다, 우 - 엘파바"에서 "좌 - 엘파바, 우 - 글린다"로 변경하며 진행하는 장면이 주가 됩니다.
그리고 해당 샷에서 사용된 연출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서서히 글린다에게 다가가는 카메라
2) 카메라는 글린다의 머리가 문 원형 유리에 놓일 때 정지
3) 정지한 순간에 맞춰 드리우는 약한 조명 (인물을 특징적으로 조명)
4) 외부 - 내부로 이어지는 컷에서 원형 유리에 글린다 얼굴을 배치해 항상성 유지
중립씬 이후 진영 위치가 뒤바뀐 상황 (좌 - 엘파바, 우 - 글린다)
바뀐 진영에 맞춰 두 인물의 시선 방향이 바뀐 상황
감독의 감각이 빛을 발하는 장면이라 넣었습니다
1) 원형 식탁을 중심으로 반시계 회전하는 인물들
2) 글린다의 고개 젖힘이 인물들의 이동과 반대로 이동해 역동감을 부여
3) 도착한 글린다의 위치와 다음 샷의 엘파바 위치가 비슷한 위치로 이어짐 (Eye fix)
4) 글린다의 이동 방향과 엘파바의 이동 방향이 정반대
개인적으로 아쉽다고 생각하는 컷입니다. "좌 - 엘파바, 우 - 글린다"에서 다시 "좌 - 글린다, 우 - 엘파바"로 넘어오는데, 이전 샷이 끝나고, 이번 샷에서 인물이 등장하기까지 시간이 적어 살짝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한 번 시작한 씬에서 두 인물 위치에 항상성을 유지하는 모습을 통해 인물 대립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시퀀스에서 가장 아쉽다고 생각했던 파트입니다. 봉을 맞대며 다시 좌우를 바꾸는 시도는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느낌이 강했지만, 이후 다시 교내로 돌아가는 파트에서 다시 두 인물 위치가 바뀌어 극장에서 보는데도, '어...?'라는 생각이 들었던 장면입니다. 글린다가 봉을 오른손을 이용해 엘파바의 왼쪽으로 튕겨낸 것이 두 인물의 맞대는 샷 구도에 영향을 주었는데, 그 이후로의 샷으로의 매끄러움은 떨어진 것으로 예상되네요.
마지막 장면은 두 인물의 관계를 보여주는 연출이 주를 이룹니다. 글린다가 책상에서 엘파바를 힘으로 밀어내며 관계의 우위를 거머쥐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녀가 교내를 행진하는 모습을 카메라는 로우앵글로 보여주며 그녀를 확대합니다. 마치 그녀가 근소 우위의 관계이며, 카메라에 거대하게 잡힐 존재처럼 말이죠.
그러나 카메라는 점차 위로 올라가 하이앵글로 글린다를 비추며, 뒤로 빠집니다. 마치 그녀가 작고, 별 볼일 없는 존재인 것처럼 말이죠. 왜 그럴까요? 이유는 바로 다음 샷에서 이어지는 그녀가 바라보는 왼쪽 상단 방향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녀가 다시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는 걸 놓치지 않고 넘어가시죠.
글린다가 보던 것은 엘파바가 마담 모리블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법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지닌 글린다가 엘파바에게 유일하게 부러워하는 사실이죠. 해당 샷에서도 엘파바는 좌측에 위치하고, 우측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받고 싶은 마담 모리블의 관심은 자신이 아닌 엘파바를 향한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해당 샷 이후, 글린다가 봉 싸움에서 밀리는 장면까지 추가하여 확실하게 두 인물의 신경전의 승자가 엘파바임을 확정 지어줍니다. 그래서 식당에서도 기고만장했던 글린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어 올리는 샷이 보이게 된 것이죠.
해당 시퀀스의 마지막 씬입니다. 기숙사방으로 들어온 두 인물의 위치가 이전 샷과 동일하게 "좌 - 엘파바, 우 - 글린다"로 이어지며, 두 사람이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는 샷은 깨진 유리창을 프레임으로 두어, 두 인물의 관계가 유리창처럼 날카롭고, 위험하며, 쉽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며 시퀀스가 마무리됩니다.
이런 장면들이 모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영화가 위키드가 아닐까 싶습니다. 얼마나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설계를 했을지 감도 안 잡히는데... 개인적으로 보는 내내 연출이 촘촘하고,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어 놀란 장면이 몇몇 더 있는데, 다시 볼 기회가 생긴다면 한 번 더 즐겨보고 싶네요.
'소소한 영화 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에서 공간의 분리 - '기생충'과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통해 이해하기 (0) | 2023.06.2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