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간단 후기

[영화 후기]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 2023)

무비서포터 2024. 3. 2. 12:22

 

 패스트 라이브즈를 우연찮은 기회로 개봉 전에 미리 보고 왔습니다. 개인적으로 24년도 들어서 본 드라마 영화 중에서 단연코 최고작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관객에게 선사하는 충격은 그다지 강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담고 있는 메시지와 극의 구성, 그리고 여러 메타포가 환상적으로 어우러지는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줄거리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린 시절, 서로 사랑하던 아이들이 여자 아이의 이민으로 인해 갈라지며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주로 보이는 내용은 '잊지 못할 첫사랑'과 '이민자의 고충'이 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 둘을 통해 궁극적으로 '정착하지 못하는 이민자의 정체성'을 정교하고, 우아한 미장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운명의 갈림길 장면

 

 

 처음으로 인상 깊었던 장면은 어린 시절의 나영과 해성이 마지막으로 헤어지던 골목 갈림길 장면입니다. 왼쪽 골목은 해성의 집, 오른쪽 골목은 나영의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이죠. 이를 통해 영화는 직접적으로 둘의 운명이 갈라서게 될 것임을 직접적으로 암시합니다.

 

 거기에 덧붙여 골목길에 분명한 고저차가 존재합니다. 나영의 목적지는 해성의 목적지보다 훨씬 더 높아 보입니다. 여기서 영화는 크게 두 가지를 더 보여줍니다. 첫째로 두 사람의 인생 끝에 이뤄낼 성취는 나영이 훨씬 더 좋을 것임을 암시합니다. 영화를 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영은 미국에서 작가의 꿈을 키워나가며, 수상할 가능성이 높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반면에 해성은 평범한 엔지니어로 살고 있습니다. 밤이 되면 친구들과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하는 전형적인 대한민국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두 사람 관계의 고저차이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해당 장면에서 딱 한 번씩 두 인물을 클로즈업으로 잡아주는데, 나영은 아래에서 쳐다보는 앵글이었고, 해성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앵글로 보여줍니다. 이는 둘의 사랑은 해성이 갈구하며, 나영은 이를 받아주는 관계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암시하는 장면이죠. 이는 12년 뒤에 해성이 나영을 간절히 찾으며 드러나죠. 그리고 이는 대사로도 나타납니다. 총 두 번의 대사가 있는데, 어릴 적 나영이 이민 가기 전에 '해성은 반드시 나와 결혼할 것이며, 나를 기다릴 것이다.'라는 확언을 남깁니다. 그리고 마지막 술집 장면에서 해성이 '전생에 나영은 여왕이었고, 나는 호위무사가 아니었을까?'라는 대사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의 둘의 관계성이 평등하지 않고, 어긋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영이라는 캐릭터

 

 어찌 보면 나영이라는 캐릭터는 주도적이며, 혹은 권위적인 인물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해성과의 관계도 있습니다만은, 다른 여러 요소들도 나영의 캐릭터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동생의 이름을 뺏는 장면입니다. 이민에 앞서 나영의 부모님은 아이들에게 미리 영어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나영은 부모님이 동생에게 준 '미셸'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계속 뺏고자 하죠. 그러자 부모님은 동생의 이름을 뺏으면 안 된다며 '노라'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줍니다.

 

 두 번째로 친구들에게 이민 가는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나영은 갑작스러운 이민의 연유를 궁금해하는 친구들에게 '노벨문학상을 타고 싶은데, 한국인은 탈 수 없으니까 이민을 간다.'라고 설명합니다. 거기엔 연인 해성도 같이 있었는데요. 이는 나영의 마음속에 해성보다 자신의 꿈이 자길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우선임을 표현한 장면입니다.

 

 세 번째로 캐나다를 떠나고 미국으로 재차 이민을 간 모습입니다. 역시나 작가라는 꿈을 위해 뉴욕으로 이주하고, 미국인과 결혼하며 미국 영주권을 따내는 나영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장면입니다.

 

 네 번째로 나영과 아서와의 관계입니다. 이 둘의 관계는 은근히 해성과의 관계와 비슷한 면모가 있습니다. 둘은 나영을 특별하게 여기며, 그녀를 위해 자기 삶의 일부를 내어줄 정도로 헌신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아서가 한국어를 배우고, 처갓집에서 화투를 친다는 묘사는 아서가 나영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나영이 유대교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묘사는 전무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해성이 남자답고, 끌린다는 말을 서슴없이 아서 앞에서 말할 정도입니다. 이 또한 나영의 권위적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장면들이었습니다.

 

 영화를 끝까지 보다 보면 나영의 성격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어릴 때처럼 자신의 꿈을 좇으며, 자신을 사랑하는 인물들에겐 권위적인 인물로 비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4년 후, 해성이 뉴욕을 방문하며 나영에게도 큰 변화가 발생합니다.

 

회전목마 앞에서

 

 

 갈림길 이후 인상적이었던 장면입니다. 뉴욕에 방문한 해성이 나영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는 장면으로 뒤에는 회전목마가 빛나며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회전목마의 말 위치와 방향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해성의 머리에서 시작해, 나영의 머리를 지나치는 목마의 배치가 마치 '해성이 24년 동안 간직했던 '말'이 나영의 머리를 강타하는 장면'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해성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한국적인 아이덴티티를 나영에게 전달'하는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만남 이틀차

 

 

 해성을 만나는 둘째 날, 나영은 나가기 전에 아서에게 '해성은 Korean-American과 다르다. Korean-Korean 같다.'라는 말을 남깁니다. 그리고 여행 때 나영이 입은 복장 색으로 해성과의 만남이 그녀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화는 둘의 어릴 적 시절부터 착용하는 의상 색을 분명하게 표시하고 있습니다. 나영은 밝은 계통의 흰색, 혹은 갈색 옷을 입고 있으며, 해성은 파란색 복장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첫 만남에서 두 색의 명확한 대비가 이어지고 있죠. 그러나 여행 둘째 날에 나영의 옷 색깔이 바뀝니다. 진한 남색 계열 옷으로 낮엔 푸른빛을 보이며, 밤엔 검은색으로 보이는 그런 옷을 입고 등장하죠.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의미는 '푸른색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상직하는 색', '흰색은 자신의 꿈을 좇는 이민자의 색'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영은 미국에서 만나는 이민자들에게서 느낄 수 없던, 자신의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해성을 만남으로써 다시 살아났거나, 혹은 이를 뉴욕 시내에서 표출하는 것이 편안한 상황이 되었음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또한 나영의 마음을 색으로 묘사한다면 흰색 영역, 파란색 영역, 그리고 검은색 영역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민자로서 아서에게 보여주는 영역은 흰색 영역이며, 그가 평생 다가갈 수 없는 파란색 영역이 그녀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검은 색 옷은 어떤 의미인가?

 

 

 확실하게 와닿는 감정의 영역은 아니었습니다. 영화에서 묘사가 많지도 않았고, 붙잡히는 대사도 기억 속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제가 모르는 감정의 영역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오프닝 장면으로 남들이 나영, 해성, 그리고 아서의 관계를 유추하며 서로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누가 사랑하는 관계인지, 관광 온 관광객인지 나름 판단하는 장면인데요. 이는 다시 이민자인 나영의 정체성이 남들이 보았을 때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복잡 미묘한 상황에서 나영이 느끼는 혼란스러움, 슬픔 등이 혼재되어 있는 감정이지 않을까 유추해 봅니다.

 

이 둘의 인연

 

 

 지하철에서 같은 봉을 붙잡으며 목적지로 향하는 나영과 해성은 두 사람의 인연이 어떤 인연인지 여실히 드러내는 장면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출퇴근을 하기 위해 탑승하는 지하철은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공간이며, 서로 다른 자리에 앉아 스마트폰을 하며 남에게 큰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봉을 붙잡고, 서로를 마주 보는 사람이라면 상당한 친밀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겠죠.

 

 이 지하철 장면은 우리의 인생과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전철에 탑승해, 무수히 많은 낯선 사람을 만납니다. 길거리를 지나치며, 아니면 한 두어 마디 얘기를 나누는 인연이 존재하겠죠. 그러나 서로 눈을 마주 보며, 감정을 교류하는 인연으로 발전하는 관계는 무척이나 드뭅니다. 마치 해성과 나영처럼 말이죠. 그러나 이번 삶에서 같은 봉을 붙잡는 인연이지만, 이 봉은 역설적으로 두 사람의 공간을 나눠놓는 봉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관계는 오직 봉을 붙잡는 것에서 끝날 관계라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죠.

 

롱테이크 - 이민자가 나아가야 할 방향

 

 

 여행의 마지막 날, 나영은 해성를 바래다주며 길거리를 걷습니다. 영화는 평면적으로 둘이 걷는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이때, 둘의 이동 방향이 흥미롭습니다. 처음에 해성을 바래다주러 가는 방향은 왼쪽, 바래다준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방향은 오른쪽입니다. 보통 인물이 우측으로 이동하는 경우는 순행이며 올바른 행위로 치부하며, 좌측으로 이동하는 경우는 역행으로 옳지 않은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즉, 해성을 따라 한국으로, 한국인의 정체성을 따르는 것은 이민자인 나영에게 올바른 일이 아니며, 자신의 운명을 역행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혹은 나영이 가진 정체성의 위치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좌측은 한국인의 영역, 우측은 미국인의 영역이라 본다면, 나영은 이민자로서 두 영역 사이에 발을 걸친, 애매한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가 한국인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며, 미국인이 되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임을 보여주는 인상적인 장면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엔딩 - 서로 다른 길

 

 

 영화의 엔딩은 해성을 태운 택시가 다리를 지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영화에서 택시는 우측으로 이동하는데, 갑자기 해성이 있는 다리의 포커스를 풀고, 뒤편으로 보이는 다리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그 다리에서 움직이는 차량도 역시나 우측으로 이동하고 있죠. 이는 해성과 나영이 걷고 있는 길이 서로 다른 뿐,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고 은유하고 있습니다. 보다 나아가 영화의 메시지인 '이민자의 선택이 틀린 것이 아닌, 그저 다른 길을 걷는 것일 뿐.'이라는 감동적인 메시지도 함유하고 있는 완벽한 엔딩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후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