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무비서포터입니다.
오늘 들고 온 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입니다. 다가오는 열차에 팔 벌려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는 장면이 유명한 영화로, 해당 장면이 인상적이었던지 코미디에서 자주 사용되고는 했었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그다지 밝지는 않습니다. 20년이 지나 만난 대학 야유회에서 영호의 모습은 망가져 있었는데, 그 이유를 파헤치는 영화이기 때문이죠. 폭풍과도 같았던 20세기말 한국의 혼란스러웠던 사회를 한 인물의 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위대한 명작, '박하사탕' 여러분들에게 추천드립니다.
영화 소개 (스포일러 x) |
"나 다시 돌아갈래!" - 극 중 영호의 대사 |
장르 : 드라마, 서스펜스, 스릴러, 느와르, 하드보일드, 피카레스크
감독 : 이창동
주연 : 설경구(영호), 문소리(순임), 김여진(홍자)
상영 시간 : 129분
영화는 어둠으로 가득 찬 터널 속을 헤치는 기차가 불빛이 흘러나오는 출구로 향하며 시작됩니다.
'야유회' 1999년 봄. 기차가 오가는 한 내천에 은색 정장을 입은 영호가 모래바닥에 눈물을 흘리며 누워있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텐트를 치고, 노래를 들으며, 흥겹게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같이 춤을 춥니다. 낯선 사람이 다가오자 놀란 사람들이 이상하게 바라보던 그들은 그가 영호라는 것을 기억합니다. 반갑다는 인사와 함께, 그들은 자연스럽게 영호를 술자리로 인도합니다. 야유회 회장은 소주 한 잔을 영호에게 건넵니다. 그러면서 연락을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친구들에게 연락을 아무리 돌려도 영호 소식을 몰라서 연락을 못했다며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거듭하죠. 이에 영호는 성가시다는 듯이 '괜찮다잖아요!'라고 소리 지르며 분위기를 냉랭하게 만듭니다. 썰렁한 분위기에 머쓱했는지 영호는 노래 한 곡 부르겠다며 자리를 벅차 일어나 마이크를 집어듭니다. 마이크 전원도 켜지 않고, 노래 반주도 없이 '나 어떡해'를 부르기 시작하는 영호. 옆에 있던 친구가 반주를 틀어주지만, 영호는 제멋대로 노래를 이어 나가며 분위기를 초상집 분위기로 만들어버리죠. 이에 친구들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영호에게서 마이크를 빼앗고, 신나는 노래를 선곡하며 다시 분위기를 끌어올립니다. 영호는 이내 새로운 노래에 맞춰 춤을 추나 싶더니, 텐트 속을 휘집고, 물속으로 들어가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지릅니다.
영호가 떠나간 야유회는 사람이 많이 바뀌었다며, 영호가 20년 전에 뭘 했었는지 잠시 얘기를 나눕니다. 그러고는 붉게 물든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며 하하 호호 웃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뒤에 놓인 철도 위에서 소리를 지르며 불안하게 뛰어다니는 영호. 친구들은 그래도 걱정스러운지 내려오라고 외칩니다. 열차가 다가오고 있는 소리가 들리고, 친구 한 명이 달려가 내려오라고 설득하지만 영호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열차는 그가 서있는 반대편 철도로 지나갔고, 잔뜩 긴장했던 친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다시 한번 내려오라고 다그치지만, 꿈쩍을 않는 영호. 친구들은 결국 질려 버렸는지 춤이나 추자며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영호를 설득하러 간 친구는 왜 그러냐고 묻습니다. 아니, 어찌 되었든 내려와서 얘기 좀 하자고 설득하죠. 그러나 영호는 알 수 없는 고성만 내뱉을 뿐입니다. 다시 열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며, 영호 뒤로 보이는 터널에서 열차가 경적을 울리며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영호는 단호한 결의에 찬 표정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더니, 몸을 열차 쪽으로 돌려 팔을 한껏 벌리죠. 그리고 외칩니다. '나 다시 돌아갈래!'
그의 외침에 마법이라고 있던 것일까요? 기차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하며, 과거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를 좋아하는 분', '독특한 전개 방식의 영화를 좋아하는 분'
이런 분들에게는 비추천합니다! : '서정적인 영화를 싫어하는 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를 싫어하는 분'
여기까지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을 위한 스포일러 없는 영화 소개입니다.
아래로 내리시면, 제가 영화를 여러분들에게 추천하게 된 계기를 스포일러와 함께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본문에 앞서, 노래를 들으며 시작하시죠!
기승전결을 뒤집다 |
보통의 영화는 기승전결 혹은 5막의 구조를 가집니다.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 - 주인공과 주변 인물의 성격을 소개하며, 주인공에게 목표를 제시함
승 - 주인공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함. 그 과정에서 작은 목표 달성하며 가능성을 보여주지만, 내부적인 심리 상태와 외부적인 위기 요소 때문에 어려운 목표는 달성이 힘듦
전 - 주인공에게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치고, 이를 극복하며 내-외부적인 성장이 발생
결 - 목표를 달성하고, 인상적인 결말을 맞이함
주인공과 배경을 소개하며, 사건이 진행되기에 대부분의 영화는 시간 순서 따라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가장 보편화되어 있으며, 관객들이 받아들이기 가장 좋은 플롯 전개라 볼 수 있죠.
그러나 영화 '박하사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결'부터 시작해, '기'에서 끝나는 영화로 완전히 시간의 순서, 이야기의 순서를 뒤집어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상황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혼란을 가지고 영화를 지켜볼 수밖에 없겠죠. 그들에게 심어지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질문, '왜 영호는 저렇게 되었을까?'입니다.
이창동 감독의 이런 전개는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왜냐하면 비극의 '기승전결'을 뒤집어 '추리물'을 만들어 냈기 때문입니다. 먼저 영호에 대해 호기심을 유발하고, 한 장, 한 장, 극을 전개하면서 서서히 그의 인생을 드러내기 시작하죠. 증거를 제시하고,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추리극과 매우 유사한 전개입니다. 극의 마지막 순간, 우리는 사건이 발생한 원인을 파악할 수 있으며, 기상천외한 인물처럼 묘사되었던 영호가 순수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아련한 결말을 매듭지었습니다.
그는 왜 망가졌는가? |
위에서 언급했듯이 영화를 이끌어 나가는 원동력은 '영호가 왜 망가졌는가?'입니다. 기차에서 자살을 시도하고, 권총 자살을 시도하며, 이전에 추억들을 간직한 필름을 빛에 노출시켜 사라져 버리게 만드는 감정적인 행동을 보입니다.
그가 변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되어 한 여학생을 사살한 것이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던 연인과 비슷하게 생겼던 한 여학생을 살려주려고 했었지만, 자신을 찾아오던 다른 군인들에게 발각될까 봐 위협사격을 가한 것이 그녀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었죠. 이후 그는 자신이 원치 않는 일들을 겪게 됩니다. 경찰로 근무하며 사람들을 고문해야 했고, 원치 않던 여인과 결혼하며, 그 여인이 바람을 피웠고, 이혼과 IMF 사태로 가정은 파탄 났으며, 권총으로 자살하고자 하지만 고장 난 권총이기에 뜻대로 자살도 하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영호, 본인이 원치 않는 사건들입니다.
영호는 자기 파괴적인 면모를 보입니다. 자신에게 닥친 비극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면서 말이죠. 경찰이 된 영호에게 찾아온 순임은 영호의 손을 보며 착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방금까지 물고문을 하고 왔던 영호는 그녀의 말을 부정하기 위해 옆에 있던 홍자를 성추행합니다. 아내 홍자가 바람피우는 사실을 알고는, 맞바람을 피우기도 하고요. 게다가 IMF로 부도를 맞고, 이혼까지 당한 상황에 권총으로 생을 마감하려고 합니다. 젊은 영호는 순수했습니다. 그러나 강압적인 사회를 맞이하게 되었고, 그 원인을 외부가 아닌 본인으로 지목했죠. 선인이 아닌, 악인으로 변해야 했던 영호. 결국 자신의 손으로 빚어낸 파멸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영호가 자기 파괴적인 면모를 보이지 않았다면, 남들과 똑같이 살 수 있었을까요? 이 부분에선 이견이 갈릴 수 있지만, 저는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별 전쟁에 참전한 군인 중 심각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증상을 호소한 군인의 비율이 미국 17%, 영국 17%, 오스트레일리아 20%에 달합니다. 경증으로 증상을 확대하면 그 비율은 증가할 것입니다. 혹여 전문적인 훈련을 받으면 정도가 줄어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여한 22%의 베테랑 군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해당 연구는 베테랑 군인에게도 살인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입증하죠. [1]
외압에 의한 살인, 고문이었지만, 영호가 받은 스트레스는 자국처럼 남게 될 것입니다. 마치 흙탕물을 지나 옷이 더러워진 것처럼, 순수한 사람이었지만, 부당한 사회와 시대를 거치며 더러워져 버린 영호. 흙탕물을 밟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까닭은 그 자국을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겠죠.
[1] JMVH -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and Killing in Combat: A Review of Existing Literature : https://jmvh.org/article/post-traumatic-stress-disorder-and-killing-in-combat-a-review-of-existing-literature/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줄 평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새 옷이 흙탕물 만나 얼룩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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